나경택 칼럼리스트

▲ 칭찬합시다 운동중앙회 회장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유작(遺作) '논쟁술'에는 말싸움에서 이기는 법 36가지가 나온다. 이런 대목들이 있다. '상대방을 화나게 하라/ 상대방 주장을 과장하라/ 상대가 피하는 약점을 몰아붙여라/ 전문 지식이 부족한 청중을 이용하라/ 질 것 같으면 딴소리를 하라/ 반론할 게 없으면 모른다고 하라….' 우리 정치권에서 흔히 봐와서 낯설지가 않다.

TV 토론에 나온 정치인이 대통령 말을 ‘위헌’이라고 하자 반대쪽 사람이 “무슨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대통령이 무슨 말만 하면 종소리 듣고 침 흘리는 개처럼 위헌 얘기부터 한다”고 맞받는다. 그다음부터 정상적인 대화와 토론이 힘들어진다. 상대 당 정치인의 떡볶이집 방문에 대해 "떡볶이집에 가지 마십시오. 손님 떨어집니다"라고 했더니 즉각 "떡볶이집 망하라고 저주를 퍼부은 막가파식 발언"이라는 반격이 돌아왔다. 상대를 궁지로 모는 기술이다.

정치권 말싸움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았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말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16년 트럼프와 힐러리의 대선 TV 토론 장면이다.

■사이코패스·괴물… 갈때까지 갔다

힐러리가 트럼프의 음담패설을 물고 늘어지자 트럼프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과거 성추문으로 응수했다. “내가 한 것은 말뿐이었지만 클린턴이 한 것은 행동이다. 훨씬 나쁜 짓이다.” 상대 약점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마지막 방법은 ‘인신공격’이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인신공격이나 모욕을 주라'고 했다.
여기까지 갔다는 얘기다. '사이코패스'와 ‘괴물’까지 등장한 우리 정치권은 갈 데까지 갔다.

여야 간 ‘독재자’를 둘러싼 말싸움이 한창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을 겨냥해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이라고 하자 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진짜 독재자 후예는 김정은인데 그 대변인 역할만 하고 있다”고 맞받았다. 여당 대변인은 “독재자의 후예라고 한 적 없는데 제 발 저려 저런다”고 하고, 야당 대변인은 “독재자 후예 타령은 자신을 향한 독재자 비난이 뼈저려서 그렇다”고 했다. 여권을 향해 ‘남로당 후예가 아니라면…’이라는 비난도 나왔다.

상대를 인정 않으니 타협의 여지가 사라지고 논리와 내용 없는 감정적 말싸움만 이어진다.
여야 모두 ‘내년 총선에서 지면 끝’이라고 생각하니 말싸움은 더욱 격해질 것이다. 그런데 5년, 10년 후에 이 나라가 무엇을 먹고 살 건지 걱정하는 사람이 누가 있기는 있나!

정치권의 험한 말들이 끝없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정치인들이 앞다퉈 자극적인 말로 지지층의 주목을 받으려는 경쟁을 벌이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제는 ‘막말 배틀’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다. 더는 한국 정치에 품위 같은 것을 기대해선 안 되는지 답답할 따름이다 자극적인 말들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분명하다. 백이면 백, 소속 정당이나 정파의 지지층을 향하고 있다. 통쾌하고 자극적일수록 열광하는 지지자들에게 더 큰 지지를 호소하는 방식이 돼버렸다. 상대편이나 중간 지대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

■분열·증오 증폭시키는 ‘막말 정치’

내년 총선을 앞두고 상대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막말로 흠집을 내려는 시도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막말 파문이 있을 때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국회 윤리특위에 징계안을 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징계안을 내기 전에 자신들은 마이크 앞에서 어떻게 발언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는데, 다들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다.

이런 상황은 한국 정치가 협치(協治)의 정신을 잊은 채 갈수록 진영화 돼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무조건 우리 편이 이기면 된다’ 식의 진영논리가 현 정부 들어 공고해지고 있다.
언어는 사고를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극적인 말들은 공론의 장(場)을 오염시킨다. 험하고 거친 말들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합리적 토론은 발붙이기 어렵다. 갈등과 증오를 증폭시키며 분열의 사회를 만들 뿐이다.

국민의 대표라는 정치인들이 잘못 하면 결국 주권자인 시민들이 매를 드는 수밖에 없다.

-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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