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실무 교섭 진행·특사 파견도 고려해야"
"日, 국제분업 깨버려…향후 비슷한 사태 재발될 수 있어"

▲ 일본 정부의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규제에 맞서 우리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 필요한 대응조치를 취하기로 하면서 한·일간 무역전쟁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1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열린 일본 정부의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 규제 강화에 따른 수출상황 점검회의에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일간투데이 이욱신 기자] 일본의 반도체 핵심부품 수출 규제에 대응해 우리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 강경대응을 밝히면서 한·일간의 무역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최근 판문점 남·북·미 정상 회동에서 배제되면서 '저팬 패싱(일본 배제)' 논란이 불거지자 참의원 선거를 의식해서 수출 규제 강화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비판이 있는 가운데 우리 정부 또한 WTO 제소 등 강경 모드를 취하면서 사태가 조기에 끝나지 않을 모양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한·일 양국 정부 모두 냉각기간을 갖되 실무선에서 계속 사태 해결을 위한 교섭을 진행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또 필요에 따라서는 경색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특사 파견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조언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가 제대로 마무리 되지 않을 경우 일본 정부가 위안부피해자합의, 독도 문제 등에 대해서도 비슷한 방법을 활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2일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1일 일본 정부의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규제 강화에 대응한 후속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이날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1차 여성과 함께하는 평화 국제회의' 오전 세션을 마치고 기자들과 만나 '외교부 차원에서 후속대책을 준비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산업통상자원부가 전날 WTO 제소 등 대응 방침을 내놨고 외교부 차원에서는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일본대사를 초치해 항의했다"며 "앞으로 상황을 보면서 (후속대책을) 연구해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1일 일본 정부는 스마트폰 및 TV 액정화면에 쓰이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반도체 원판 위에 회로를 인쇄할 때 쓰이는 감광재인 리지스트, 그리고 반도체 세정에 사용되는 에칭가스 등 3개 품목의 한국 수출 규제를 오는 4일부터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도 이번 조치에 대한 강경 기조를 분명히 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이날자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날 경제산업성이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의 수출 규제 강화를 발표한 것에 대해 "국가와 국가의 신뢰관계로 행해온 조치를 수정한 것"이라며 "WTO의 규칙에 정합적이다(맞다). 자유무역과 관계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발언은 아베 총리가 스스로 이번 조치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후속 조치라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베 총리가 강경책을 들고 나온 데에는 이번달 21일로 예정된 참의원 선거가 있다는 견해가 많다. 당초 아베 총리는 지난달 말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을 계기로 자신의 외교 역량을 강조한 뒤 이를 이번달 열리는 참의원 선거의 호재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판문점에서 전격적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면서 G20의 외교 성과를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커다란 악재에 직면해 있다.

이날자 도쿄신문은 "미국이 북한과 가까워지고 있는 가운데 아베 정권만 보수층을 겨냥해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북한에 대해 강경 자세를 취해왔다"며 "북한 비핵화와 관련된 주변 6개국(한국, 미국, 일본, 북한, 중국, 러시아) 중 정상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지 못한 나라는 일본뿐이다. 아베 총리의 외교가 또 '모기장 밖'에 놓였다"고 비판했다. 북·미 비핵화 협상이 교착되며 한동안 잠잠해 있던 '저팬 패싱론'이 다시 부상한 것이다.

다분히 아베 총리의 자국내 정치적 목적하에 이뤄진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강화 조치에 대해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우려와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이날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은 이들 품목을 한국에 수출하거나 한국에서 반도체 메모리 등을 수입하는 일본 기업에도 여파가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아사히는 "이번 조치는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사실상의 대응(보복)조치"라며 리지스트를 생산하는 일본 대기업 JSR, 에칭가스를 생산하는 일본 모리타(森田)화학공업 등 이번 사태에 영향을 받는 기업 관계자들이 "한국에서 반도체 생산이 줄어들면 (일본 기업의) 설비투자가 감소할 수 있다"는 우려를 보도했다.

일본 최대 경제지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날 일본 정부에 '전 징용공을 둘러싼 대항 조치의 응수를 자제하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고 "징용공 문제에 대해 통상정책을 가지고 나오는 것은 (일본) 기업에 대한 영향 등 부작용이 커서 긴 안목에서 볼 때 불이익이 많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대항 조치는 한국의 생산에 영향을 주는 동시에 한국 기업이 대형 고객인 일본 기업에도 타격을 줄 우려가 있다. 일본발 공급 쇼크를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중국 환구시보(環球時報)도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를 보도하며 "뜻밖에 일본도 미국에서 배워 무역 제재 놀이를 했다"고 비판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도 인터넷판에서 "일본의 자유무역의 위선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일본의 행태를 질타했다.

국내 외교·통상전문가들은 한·일 양국 정부 당국이 당분간 냉각기간을 갖고 사태해결을 위한 실무적인 교섭을 진행할 것을 주문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일단 양국이 냉각기를 갖을 필요가 있다"며 "그안이라도 실무적인 차원에서 계속 교섭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또한 "전면 수출금지가 아니라 수출 심사를 강화한 만큼 WTO 제소 등 강경책보다는 좀 더 유연한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며 "정부는 모든 외교 통로를 총동원해 일본과의 통상갈등 해소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했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국제경제학회장)는 "이번 사안은 경제 문제가 아니라 외교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라며 "WTO 제소는 해결까지 2~3년이 걸리는 반면 우리 기업의 피해는 3~4개월 후 나타날 수 있다. 특사 파견 등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사태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반면 이번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에 우리 정부가 쉽게 물러서면 앞으로 위안부피해자 합의, 독도 문제 등에서 일본이 계속 비슷한 방식을 활용할 것을 우려하는 의견도 나왔다. 국제통상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수륜아시아법률사무소)는 "일본 부품 공급, 한국 중간 가공품 수출, 미국 수입이라는 수십년간 이어진 국제분업원리를 일본이 깨버렸다"고 꼬집었다.

이어 "이번에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 강화조치를 하면서 안보상의 규정을 든 것은 단순히 강제징용 노동자 배상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경제 질서 상에서 우리나라의 위치를 약화시키려는 일본의 의도가 보인다"며 "이번에 물러서면 앞으로 이런 방식으로 더 많은 요구를 해 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이번 수출규제 강화로 피해를 입은 일본 기업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본 법원에 제소하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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