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학교 친구가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건강이 최고라는 내용의 신외무물(身外無物: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이었고, 덧붙여 우리네 인생도 다 쓰다 남은 ‘몽당연필’ 같으니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자는 말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저려왔다.
가을은 참 희한하고 이다지도 아름다운 계절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밭에 남아 있는 들깨를 털다가 문득 가을하늘을 쳐다 본다. 유난히도 맑고 푸르고 높아 눈물이 핑 돈다. 뭉게구름도 정처 없이 흘러간다. 내 고향 지나갈 때 고향의 내 임(恁)에게 그간 무고하신지? 덕분에 잘 있다는 안부와 당부의 말씀도 함께 전해본다.
하던 일을 멈추고 뒷산 오솔길을 걷는다. 벌써 개울가에는 마른 잎이 소복소복 쌓여가고 흘러간 옛 추억의 그리움도 차곡차곡 함께 쌓인다. 좀 남세스런 말 같지만 공연히 외롭고 그리움이 밀려온다. 정호승의 ‘산수화에게’처럼 말이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은 전화를 기다리지 말자( ~ )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지난봄에 이 길을 중국 한나라 절세미녀(궁여) 왕소군(王昭君)이 북방의 흉노왕에게 억지로 시집가야 하는 처지를 읊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심정으로 걸었건만, 오늘은 김광균의 추일서정(秋日抒情)이 생각난다. 망명정부의 지폐, 구겨진 넥타이, 내 품는 담배연기처럼 왠지 황량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그렇고 지금보다 내일이 더 걱정이라 더하다.
그래도 가을에는 많이 생각하고 많이 걸어야 하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일찍이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모든 사고는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고 했다. 문만 나서면 걸을 수 있다. 시간과 여유 타령은 핑계다. 많이 걸어야 외로움도 덜하고 그리운 사람도 만날 수 있다.
필자는 제 작년 가을, 모일간지 아침논단에 ‘가을엔 그리운 사람과 추억을 만나자’는 칼럼을 게제한 바 있다.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찾아가서라도 만나라고 했다. 만나거든 부담도, 떠난 이유도 묻지 말고 화해를 위한 좋은 말만 하자. 세월이 흘러 이미 사랑이 식었거나 변했어도 아쉬워하지 말고 그러려니 해야 한다. 혹 돌아오는 길이 힘들고 아파도 미련에 떨지 말고 참아야 한다고도 했다.
작년엔 같은 지면에 ‘가을엔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자’고 했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거나 주위를 배회하지도 말고, 차라리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좋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설령 부치지 못하더라도 연서(戀書)를 쓰자고 했다. 될 수 있는 한 그리움이 솟구칠 때 쓰고 꼭 점검해야 한다고 했다. 혹 취한 나머지 그냥 부쳐버리면 큰 낭패이므로 가급적 붉은 우체통에 묻자고 했다. 추억과 그리움만 짙으면 이별과 잊음도 사랑이라 여겼기에 그랬다.
세월은 또 덧없이 흘러 어느덧 가을이 소리 없이 깊어만 간다. 지난날의 수많은 추억과 사무치는 그리움이 때로는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지나간 옛사랑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아파하는 독자가 있다면, 어차피 맺지 못할 인연이고 흘러가버린 사랑이었다면, 돌아오지도 만날 수도 없는데도 하루에 열 두 번 씩 생각나는 외사랑 이었다면, 올 가을에는 차라리 모든 걸 잊기를 권한다.
그러려면 카톡에 사진도 전화번호도 말끔히 지워버려야 한다. 그렇게 살다보면 흐르는 세월 속에 묻혀 무디어가고 담담해질 것이다. 무정한 사람이었다면 우연히 스치더라도 모른 체 피하고, 나쁜 기억만 떠올리면서 미워하는 것도 한 방법일수도 있다. 잊어야 할 것은 까맣게 잊는 것이 남은 가을과 내년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서다.
인생사 ‘만나면 헤어지고 반드시 돌아온다’를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고 한다. 만나야 할 운명이라면 반드시 만나는 법이고, 안되면 다음 세상에서라도 꼭 만난다는 뜻 같다. 불현 듯 단테의 신곡(神曲)이 그려진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이별의 아픔에 몸부림치던 중 지옥여행을 마치고 연옥에서 꿈에도 그리던 베아트리체를 만나, 그의 안내로 천국으로 향하는 환희의 순간이 바로 승화된 사랑 바로 그 자체다. 아베마리아 성가가 가깝게 울려 퍼지듯 가을밤은 또 그렇게 깊어만 간다. 모두들 내면이 보다 성숙해지는 후회 없는 가을이었으면 한다.
일간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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