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상섭 경북도립대학교 명예교수(행정학) 한국지방자치연구소장

초등 학교 친구가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건강이 최고라는 내용의 신외무물(身外無物: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이었고, 덧붙여 우리네 인생도 다 쓰다 남은 ‘몽당연필’ 같으니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자는 말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저려왔다.

왠지 허전하고 지나간 날들의 아련한 추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언제 부턴가 계절의 바뀜에 점점 예민해져 가고 매사가 아쉽고 감정도 차츰 감성적으로 변해간다. 나이 탓인가? 아니면 계절 탓인가?

가을은 참 희한하고 이다지도 아름다운 계절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밭에 남아 있는 들깨를 털다가 문득 가을하늘을 쳐다 본다. 유난히도 맑고 푸르고 높아 눈물이 핑 돈다. 뭉게구름도 정처 없이 흘러간다. 내 고향 지나갈 때 고향의 내 임(恁)에게 그간 무고하신지? 덕분에 잘 있다는 안부와 당부의 말씀도 함께 전해본다.

하던 일을 멈추고 뒷산 오솔길을 걷는다. 벌써 개울가에는 마른 잎이 소복소복 쌓여가고 흘러간 옛 추억의 그리움도 차곡차곡 함께 쌓인다. 좀 남세스런 말 같지만 공연히 외롭고 그리움이 밀려온다. 정호승의 ‘산수화에게’처럼 말이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은 전화를 기다리지 말자( ~ )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자체가 ‘외로움과 그리움’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가을엔 내 곁을 떠나간 누군가가 한정 없이 그립고 보고파도 알량한 체면 때문에 말도 못하고 에둘러 표현해왔다.

지난봄에 이 길을 중국 한나라 절세미녀(궁여) 왕소군(王昭君)이 북방의 흉노왕에게 억지로 시집가야 하는 처지를 읊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심정으로 걸었건만, 오늘은 김광균의 추일서정(秋日抒情)이 생각난다. 망명정부의 지폐, 구겨진 넥타이, 내 품는 담배연기처럼 왠지 황량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그렇고 지금보다 내일이 더 걱정이라 더하다.

그래도 가을에는 많이 생각하고 많이 걸어야 하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일찍이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모든 사고는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고 했다. 문만 나서면 걸을 수 있다. 시간과 여유 타령은 핑계다. 많이 걸어야 외로움도 덜하고 그리운 사람도 만날 수 있다.

필자는 제 작년 가을, 모일간지 아침논단에 ‘가을엔 그리운 사람과 추억을 만나자’는 칼럼을 게제한 바 있다.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찾아가서라도 만나라고 했다. 만나거든 부담도, 떠난 이유도 묻지 말고 화해를 위한 좋은 말만 하자. 세월이 흘러 이미 사랑이 식었거나 변했어도 아쉬워하지 말고 그러려니 해야 한다. 혹 돌아오는 길이 힘들고 아파도 미련에 떨지 말고 참아야 한다고도 했다.

작년엔 같은 지면에 ‘가을엔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자’고 했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거나 주위를 배회하지도 말고, 차라리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좋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설령 부치지 못하더라도 연서(戀書)를 쓰자고 했다. 될 수 있는 한 그리움이 솟구칠 때 쓰고 꼭 점검해야 한다고 했다. 혹 취한 나머지 그냥 부쳐버리면 큰 낭패이므로 가급적 붉은 우체통에 묻자고 했다. 추억과 그리움만 짙으면 이별과 잊음도 사랑이라 여겼기에 그랬다.

세월은 또 덧없이 흘러 어느덧 가을이 소리 없이 깊어만 간다. 지난날의 수많은 추억과 사무치는 그리움이 때로는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지나간 옛사랑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아파하는 독자가 있다면, 어차피 맺지 못할 인연이고 흘러가버린 사랑이었다면, 돌아오지도 만날 수도 없는데도 하루에 열 두 번 씩 생각나는 외사랑 이었다면, 올 가을에는 차라리 모든 걸 잊기를 권한다.

그러려면 카톡에 사진도 전화번호도 말끔히 지워버려야 한다. 그렇게 살다보면 흐르는 세월 속에 묻혀 무디어가고 담담해질 것이다. 무정한 사람이었다면 우연히 스치더라도 모른 체 피하고, 나쁜 기억만 떠올리면서 미워하는 것도 한 방법일수도 있다. 잊어야 할 것은 까맣게 잊는 것이 남은 가을과 내년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서다.

인생사 ‘만나면 헤어지고 반드시 돌아온다’를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고 한다. 만나야 할 운명이라면 반드시 만나는 법이고, 안되면 다음 세상에서라도 꼭 만난다는 뜻 같다. 불현 듯 단테의 신곡(神曲)이 그려진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이별의 아픔에 몸부림치던 중 지옥여행을 마치고 연옥에서 꿈에도 그리던 베아트리체를 만나, 그의 안내로 천국으로 향하는 환희의 순간이 바로 승화된 사랑 바로 그 자체다. 아베마리아 성가가 가깝게 울려 퍼지듯 가을밤은 또 그렇게 깊어만 간다. 모두들 내면이 보다 성숙해지는 후회 없는 가을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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