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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걸의 창건설화] 결사로 선불교를 바로 세운 봉암사(鳳巖寺)

  • 최종걸 주필
  • 승인 2019.11.13  15:47:58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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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암사 경내 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계곡에 있는 옥석대(玉石臺)는 암석에 조각된 불상 아래 넓게 깔린 암반에서 목탁 소리가 난다는 곳이다. 사진 제공 봉암사
불교가 인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로 각각 들어온 이래 자기 혁신을 통한 큰 흐름이 있었다면 고려 시대 '정혜결사(1210년)'와 지난 1947년 '봉암사 결사'를 들 수 있다.

바로 그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는 한국 불교의 선맥을 결사(結社)를 통해 이은 도량이다. 신라 헌강왕 5년에 지증 도헌(道憲 824-882) 국사가 창건한 신라 고찰이자 마음을 깨닫는 선(禪) 불교를 수행으로 삼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근본 도량이다.

봉암사(鳳巖寺)의 봉암은 봉황(鳳凰)새 봉(鳳)과 바위 암(巖)을 뜻한다. 지증 도헌 국사가 희양산 중턱에 절을 지을 당시 현재 사찰 입구에서 백운 계곡의 숲길을 따라가다 보이는 계암(鷄巖)이라는 큰 바위에서 닭 한 마리가 매일 새벽을 알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계(鷄)를 봉(鳳)으로 바꿔 부른 셈이다.

봉암사에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선맥을 현대에 이은 불교 혁신의 시발점이 된 곳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불교의 수행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정혜쌍수론(定慧雙修論)을 바탕으로, 세속화되고 정치와 연관돼 타락한 불교를 벗어나 산림에서 선(禪) 수행에 전념하자는 운동인 고려 시대 정혜결사(1210년) 이후 지난 1947년에 바로 봉암사에서 봉암사 결사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고려 말기 불교는 선교 양종으로 교종은 학문불교이자 체제 불교였고, 선종은 은둔 불교적인 성격이 강해 일반 대중에게서 멀어지면서 교종과 선종 사이의 갈등에다 무신 난과 몽골침입 등 정치·사회적인 변화도 휘몰아쳤다. 이에 불교계에서는 기존 불교를 반성하고 불자의 각성을 촉구하는 강렬한 비판의식 속에 불교 수행의 근본인 정(定)과 혜(慧)는 둘이 아니라는 인식 아래 두 가지를 함께 닦자는 수행실천 운동인 정혜쌍수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수행의 기치로 내세웠다. 돈오(頓悟)는 인간의 본심을 깨달아 보면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뜻이고, 점수(漸修)란 비록 돈오 하여도 번뇌는 곧 제거되는 것이 아니므로 점진적으로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는 불교 혁신 운동이었다.

고려 중기 이후 왕실과 밀착했던 귀족불교가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정혜결사로 다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으로 돌아온 이후 조선 시대에는 그마저도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불교는 불가촉천민 신세로 전락했다. 이어지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한국 불교는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였다. 이때 복천암과 도리사에서 장좌불와 수행을 일관했던 성철 스님이 1947년 겨울 조선 시대에 피폐해지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왜색화된 한국 불교를 재건하자는 ‘봉암사 결사’를 주도한다. ‘부처님법대로 살자’라는 기치 아래, 18개 조항의 공주규약(共住規約)을 만들어, 엄격한 수행을 통해 선불교를 재건하자는 결사였다. 불공과 천도재를 받지 않고 수좌 스님 스스로 자발적인 노동을 통해서 생활하자는 방침을 정했다. 봉암사 수좌 스님들은 나무하고, 물 긷고, 밭 갈고, 탁발하는 것을 일상화했다.

청담, 성철, 자운 스님을 축으로 향곡, 혜암, 월산, 성수, 법전, 우봉, 도우, 보경, 보안, 응산, 청안, 혜명, 일도, 보문, 홍경, 종수스님 등이 결사에 참여했다.

이 결사는 625동난으로 3년 만에 막을 내렸지만, 그때 참여한 스님들이 전국 사찰로 돌아가 선불교의 맥을 다시 점화시키는 주역들이었다.

하여 선불교를 전수한 중국 스님들조차 봉암사의 선승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구산선문이 신라 말과 고려 초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왔지만, 선종의 기치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고수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봉암사는 전국 사찰 중 유일하게 신도들을 포함한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특별 선원’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종립수도원’으로 한국 선원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조계종 스님들 사이에서는 봉암사를 선방 수좌들의 고향으로 한 번은 꼭 선원에서 수행을 해야 할 선원으로 여기고 있다.

바로 이곳에 담장으로 둘러있는 태고선원(太古禪院)은 한국 불교의 중흥조인 태고 보우 스님의 간화선 선풍을 중흥시키기 위해 세워졌다. 간화선(看話禪)은 중국 남송 시기에 임제종의 스님이었던 대혜 종고 스님의 선 수행법으로 ‘화두(話頭)’를 들고 참선해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의 삼관문을 타파하고 곧장 깨달음에 이르는 선 수행법이다. 고려 말 태고 보우 국사가 중국에 들어가 석옥 청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임제선의 법맥을 전수받아와 법맥을 전수한 곳이 하여 태고선원(太古禪院)이라 했다.

처음 절을 창건한 지증 도헌 국사가 봉암사를 품고 있는 희양산을 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싸인 것이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고 하면서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라 여겨 스님들과 함께 절을 세웠다고 한다.

경내 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계곡에 있는 옥석대(玉石臺)는 암석에 조각된 불상 아래 넓게 깔린 암반에서 목탁 소리가 난다는 곳이다. 이 옥석대에는 바위의 북벽을 다듬고 7∼10㎝ 정도의 깊이로 감형(龕形)처럼 판 곳이 있는데, 그 안에 높이 약 6m의 좌상(坐像)이 양각돼 있다.

최종걸 주필 jgchoi62@d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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