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악산 연주암 연주대. 사진 제공 연주암

국내에서 손꼽히는 기도처로는 설악산 봉정암, 남해 보리암, 팔공산 갓바위, 선운사 도솔암 등이 있지만 서울에서는 멀다. 최소한 1박 2일 일정을 잡아야 잠시라도 기도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와 버금가는 기도 도량이 바로 경기도와 서울시를 연결하고 있는 관악산 연주봉 연주대이다. 서울과 경기도 인근에서 누구나 대중교통으로 접근해서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연주대의 응진전을 두고 있는 연주암은 677년 통일신라 문무왕 17년에 의상(義湘) 대사가 창건할 당시 관악사(冠岳寺)라 했다고 한다. 관악산(冠岳山)의 관(冠)은 갓이라는 뜻으로 관세음보살이 머리에 쓴 관을 보관(寶冠)도 관으로 임금, 벼슬, 위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때문에 관악산(冠岳山)은 산중에 벼슬이 제일 높은 산이라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관은 벼슬이고 벼슬은 주작, 공작, 닭의 볏에 해당하는 것으로 바로 연주대가 앉아 있는 바위 모습이 닭 볏과 같다고 한다. 뾰족하게 솟아 있는 바위 위에 축대를 쌓고 암자를 앉힌 모습이 꼭 닭 볏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연주대는 관악산 정상 닭 볏 위에 자리 잡은 해발 600m 높이로 깎아지른 바위 절벽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자리에 의상대사가 수도했다 해서 의상대라 했다.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면 낭떠러지인 백척간두 자리에서 목숨 걸고 수행했던 곳이다. 도를 통하지 못하면 떨어져 죽겠다는 결의를 가진 수행자들만이 찾는 기도 터이기도 하다.

부안 변산에서 목숨을 걸고 수행했던 진표율사가 수행한 터인 부사의방(不思議房), 해남 달마산의 도솔암, 구례 사성암도 비슷한 벼랑 끝 절벽에 자리 잡고 있다.

의상대에서 연주대로 바뀐 것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1392년 의상대를 중건하고 그의 처남인 강득룡(康得龍)이 연주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강득룡·서견(徐甄)·남을진(南乙珍) 등이 이곳에서 고려의 수도인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고려왕조를 연모하면서 통곡하였기 때문에 연주대(戀主臺)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또 1411년 태종 11년에는 태종의 첫째와 둘째 아들이 왕위에서 벗어나 셋째인 충령대군(忠寧大君)에게 왕위가 건너뛰자 아버지의 뜻을 헤아린 장남 양령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은 유랑 길에 올랐다가 이곳에 머물면서 왕궁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현 위치로 절을 옮겼다고 한다.

연주암에는 대웅전, 천수관음전, 효령각, 금륜보전, 영산전, 12지탑, 좌불, 연주대의 응진전 등이 있다. 연주암에서 전망대를 지나 올라가면 연주대의 응진전(나한전)이다. 관악산 정상 연주봉인 연주대에 응진전과 그 입구에 약사여래 석상이 있어 나한 기도와 약사 기도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응진전 내부에는 석가여래상, 약사여래상 16나한상 등이 봉안돼 있다. 응진전에는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을 봉안하기 때문에 주로 대학 입시, 고시 등을 앞둔 수험생들이 많이 찾고, 응진전 입구의 앞 벽에 조성된 석조 약사여래불은 치병 기도를 위한 신도들의 발길이 잦다.

연주암 응진전 옆 암벽 감실에 약사여래 석상이 봉안돼 있는데 암벽에 100원짜리 동전을 붙이고 난 후 이마를 바위에 대고 기도하면 재운도 트인다는 속설이 내려오고 있다.

동생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한 효령대군이 연주대에 와서 한양 도성을 바라보면서 복잡한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뜻을 담은 연주대(戀主臺)란 뜻이다. 임금을 뜻하는 주(主)인 세종을 위한 연모하는 마음과 함께 ‘저 자리가 내 자리인데’하는 한(恨)도 서려 있을 것이라는 후대인들의 풀이다.

시절 따라 수행처와 기도터도 그 대상이 변모했지만,  중수한 공덕의 기도발이 살아있는 곳이다. 지난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연주암 주지스님 소임을 맡았던 자승 스님이 천수관음전 및 효령각을 건립하는 등 연주암을 중수한 공덕의 기도발을 받은 듯 하다. 주지 소임을 맡는 동안 연주대 기도발이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이라는 벼슬에 이르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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