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사진 제공 관촉사
고사리를 꺾기 위해 산에 올랐던 여인의 귀에 아기 울음소리가 나 가보니 그 자리에 육중한 바윗덩어리가 땅속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이 같은 소식을 접한 고려 왕실에서는 “이것은 큰 부처를 조성하라는 길조”라고 여기고, 금강산에 수도 중인 혜명대사에게 불상 조성을 요청, 온몸의 길이 19m, 둘레 9.2m, 귀 길이 2.7m, 눈썹 사이 1.8m, 큰 갓의 가로 3.3m라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을 조성했다.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般若山) 관촉사(灌燭寺) 석조미륵보살입상 창건 설화이다.

혜명대사가 석공 100명과 함께 그 솟아 나온 바위로 허리 아랫부분을 만들고, 가슴과 머리 부분은 그곳에서 12㎞ 떨어진 연산면 고정리의 우두촌에 있는 바위를 일꾼 1000명을 동원해 옮겨왔다. 그러나 이미 솟아 있는 바위가 하도 커서 머리 부분을 어떻게 올릴까를 고민하던 차에 어느 날 냇가에서 어린아이들이 놀면서 ‘부처를 모신다’라고 하며 밑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쌓아 올려 덮고, 그 위에 가운데 부분을 올려놓고, 다시 모래를 쌓은 후 맨 윗부분을 올려놓는 것을 보고 비로소 크게 깨달아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동자들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현신해서 미륵보살 입상 완성 방법을 일러준 것이라고 한다.

관촉사 사적비에 따르면, 고려 4대 광종 19년인 968년에 조성하기 시작해 37년 만인 7대 목종 9년인 1006년에 석조미륵보살입상을 회향하던 날 찬란한 서기(瑞氣)가 21일 동안 천지에 가득해 찾아오는 사람으로 일대가 시장처럼 북적댔다고 한다. 미간의 옥호(玉毫)에서 발한 황금빛이 촛불처럼 밝아 송나라 지안 대사가 빛을 따라 찾아와서 예배했다 해서 절 이름을 ‘관촉사(灌燭寺)'로 지었다고 한다.

조성후 일명 은진 미륵보살에 관련된 수많은 이적과 영험담이 전하고 있다.

고려 중엽 거란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이 불상이 노립승(蘆笠僧 삿갓을 쓴 스님)으로 변해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거란군 모두가 그 강이 얕은 줄 알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노한 거란 장수가 칼로 그 노립승 삿갓을 치자 쓰고 있던 개관(蓋冠)이 약간 부서진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나라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에서 빛나고 서기가 허공에 서리지만, 난이 있게 되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었다는 등의 전설과 함께 이 불상에 기도하면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기도 영험담도 이어지고 있다.

일부 사학자들은 이 부처가 모셔진 자리는 멸망한 백제의 최후의 보루였던 계백장군과 5000명의 결사대와 이후 백제 부활을 도모한 후백제군을 제압한 황산벌을 굽어보는 자리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고려를 세운 왕건 이후 왕권 강화를 확립한 광종 때 조성한 점이다. 후백제 유민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이곳 사람들에게 고려의 강력한 왕권을 과시할 상징이 필요했고, 왕권 화신의 상징으로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역할을 대신했다는 해석이다.

우리나라 곳곳의 사찰에 모셔진 미륵 부처상의 염원이 각각 다른 것처럼 관촉사의 미륵보살 입상은 왕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얼굴 생김새와 몸통 자체가 거의 큰 바윗덩어리처럼 뚝심 있게 서 있고, 그 몸을 받치고 있는 발을 보면 어떤 강력한 힘이 밀어붙여도 끄떡도 안 한다는 듯이 든든하게 땅을 거머쥔 발가락이 앞에 나와 있다는 점 때문이다.

미륵부처님이 세상에 나오면 고통받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온다는데 바로 고려시대가 그렇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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