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내 원각사 10층석탑

불가에서 계정혜(戒定慧)를 통달한 스님들이 열반 시에 나온다는 사리(舍利)가 증식과 분식의 묘용(妙用)을 부려 세운 사찰이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탑골공원 터에 있었던 흥복사(興福寺)라는 절이 조선 태조 때 조계종(曹溪宗)의 본사로 된 사연은 이렇다.

이성계 손자이자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이 세조 10년인 1464년 4월 경기도 남양주 회암사(檜巖寺) 동쪽 언덕에 석가모니의 사리(舍利)를 봉안 후 ‘원각경(圓覺經)’을 설법하자, 그날 저녁에 공중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습과 함께 사리가 분신(分身)하여 800여 개가 되었다고 한다. 하여 5월 2일 효령대군은 사리를 조카인 세조 왕에게 보이고 함원전(含元殿)에서 함께 기도하는 중에 또다시 사리가 400여 개로 분신했다고 한다.

세조는 대사령을 내리고 5월 3일에 흥복사 터에서 종친 및 신하들과 찾아, 이 절터에 원각사를 창건할 것을 논의한 뒤 조성도감(造成都監)을 만들었다. 6월 16일에는 대종(大鐘)의 주조를 위해서 동(銅) 5만 근을 전국에서 모으도록 하자, 6월 19일에는 이 절 위에 상서로운 기운인 서기(瑞氣)가 나타났다고 한다.

10월 30일에는 효령대군이 새로 만든 불상의 분신 사리를 조카인 세조 왕에게 전했고, 11월 1일에 이 사리와 원각사의 사리에서 서기가 있어 대사면령을 내렸다고 한다.

1466년 7월 15일에는 이 절에 봉안한 백옥 불상 점안법회(點眼法會)를 베풀었고, 이듬해인 1467년 사월초파일에 회향한 10층 석탑에는 분신 사리와 언해본 ‘원각경’을 봉안했고, 주요 법당은 청기와와 금칠로 꾸몄다고 한다. 이후로도 사리가 서기를 나타내거나 분신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 이때마다 신하들은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고 사적기는 소개하고 있다.

1469년 윤 2월 29일에 또다시 사리 245개가 다시 분신하자 강도 등의 중죄를 지은 자를 제외한 도형(徒刑) 이하의 죄를 범한 자는 모두 용서하여 죄를 면하는 대사면령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성종 19년인 1488년에 원각사가 불타자 재목과 기와를 내려 중수하라고 하자 홍문관 부제학 안호(安瑚) 등이 억불정책을 이유로 들어서 명을 거둘 것을 간청했으나, 성종은 이 절이 선왕의 뜻에 따라 창건된 사찰이고 외국의 사신과 승려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선후(先后)의 하교를 받았기 때문에 중수를 예정대로 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연산군 10년인 1504년에 연산군이 원각사를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요즘으로 따지면 룸살롱 격인 기방(妓房)으로 만들고 스님들을 쫓아낸 데다 중종 7년인 1512년에는 아예 원각사를 없앴다고 한다.

원각사에 있었던 대종은 1536년에 숭례문(崇禮門)으로 옮겨 보루(報漏)의 종으로 사용하다가 1594년 다시 종각으로 옮겼다고 한다.

원각사 자리였던 탑골공원에는 국보 제2호로 지정된 원각사지십층석탑과 보물 제3호인 대원각사비가 남아 있다.

현등사 사리함을 도굴해서 삼성가에 팔아넘긴 그 사리함에서도 당시 훔쳐 갔던 사리보다 더 많은 사리가 나와 한때 삼성 측이 진짜 사리를 감추고 가짜 사리를 반환한 게 아닌가 하는 논쟁도 있었다.

계정혜(戒定慧)를 두루 갖춘 스님의 열반시 나온다는 사리의 묘용이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곳이 원각사 10층 석탑에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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