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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警·民·學 뭉친 '구국의 항전'…춘천은 6일을 버텼다

  • 유경석 기자
  • 승인 2020.06.24  15:22:55
  • 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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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시민·여직공 등 5000여발 포탄 운반 참여
소양강변 6·25전쟁 중 첫 군경합동작전
장비·훈련·전선배치 등 열세 극복

   
▲ 가래모기에서 바라본 옥산포 전경. 6.25전쟁 당시 북한군은 옥산포 보리밭에서 지형지물을 활용한 한국군 전술로 큰 피해를 입었다. 사진=김현수 기자

[일간투데이 유경석 기자] 6월 25일부터 27일 오전까지 춘천지구전투는 포병전투 양상으로 전개됐다. 옥산포 일대가 개활지로, 북한군의 이동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목측에 의한 포격이 가능한 데다 5000여발의 포탄을 적시에 이동하면서 손실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춘천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가능했다. 춘천지구전투를 軍·警·民·學이 함께한 구국의 항전이라고 일컫는 배경이기도 하다.

[글싣는 순서]

1. 송가인과 춘천, 기억의 소환…'포로 이승만' 막았다
2. 軍·警·民·學 뭉친 '구국의 항전'…춘천은 6일을 버텼다
3. "전쟁은 모두가 피해자"…춘천대첩의 교훈 '안보가 경제'

한국군 제6사단 제16포병대대는 병력의 부족으로 포탄을 공급하기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춘천방직 여직공들과 춘천사범학교 학도호국단 단원들이 손에 포탄을 들고, 시민들은 지게와 수레에 싣고 5000발의 포탄과 기관총탄 등을 운반했다. 또한 주먹밥을 지어주는 등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이보다 앞서 1950년 5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 한국군 제7연대 장병들과 함께 춘천고·춘천농공고·춘천사범고·춘천여고 학생 2500여명이 164고지(강원도립화목원 인근)와 우두산고지에 진지를 구축하는 공사에 참여했다. 이를 통해 콘크리트 유개진지와 통나무 엄체호, 전술 철조망, 대인지뢰 매설 등이 가능했다. 이는 북한군 공격을 저지·격멸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토대가 됐다.

춘천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것은 인구 분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1944년 8500호 4만5000명이던 춘천시 인구는 1945년 8월15일 광복과 함께 일본인들이 퇴거하면서 잠시 줄었다. 하지만 미국 SWNCC(국무부·육군부·해군부 3부조정위원회)에 의해 38선 결정되고, 왕래가 제한되면서 북한에서 월남 이민이 쇄도, 1947년 7만명에 육박했다. 6.25전쟁 당시 춘천시 전체 인구 중 40%가량이 월남 이민이었던 셈이다.

6·25전쟁 중 첫 군경합동작전은 26일 14시경 소양1교 측방에서 펼쳐졌다. 북한군은 춘천시내 진입을 위해 소양1교와 근화동 가래모기를 집중 공격했다. 7연대는 소양1교를, 경찰은 소양강 제방과 봉의산 정상에서 대응사격하며 저지했다. 당시 경찰병력은 강원경찰국, 춘천경찰서, 강원경찰학교와 전투경찰 9대대가 춘천에 집결해 있었다.

군경합동작전으로 노종해 내평지서장과 경찰관 등이 참여한 내평리전투도 의미가 크다. 노종해 내평지서장과 12명의 경찰, 춘성군 북상면 대한청년단 김봉림 등은 추곡리~장재동~내평리 축선으로 남진하는 북한군 제4연대를 상대로 1시간 이상 교전했다. 이 전투에서 노종해 경위와 경찰관 9명, 대한청년단원 3명이 전사했다. 내평리전투로 부창리~수구동~천전리로 향하던 진격속도가 지체되면서 춘천을 포위·섬멸하려던 계획은 무산됐다. 동시에 한국군 제7연대 제2대대는 원진나루터 남쪽 소양강 남안에서 주저항선을 구축하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했다.

軍·警·民·學이 함께한 춘천지구전투는 전쟁 초기 절대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하는 원동력으로 평가된다. 한국군과 북한군의 전투력은 비교가 불가한 상태였다. 한국군 병력은 9338명인데 비해 북한군은 4배 가량 많은 3만6938명이었다. 한국군의 경우 전쟁 전날인 6월 24일 3000여명이 장교와 장병들이 외출·외박한 점을 고려할 때 6200여명으로 기습에 대응한 셈이다. 거의 6배 수준이다.

춘천내평전투 전투경찰 추모상. 사진=강원지방경찰청

전투장비면에서도 북한군과 한국군은 4배 이상 차이가 났다. 한국군 화포는 105㎜ 곡사포 13문, 57㎜ 대전차포 12문, 박격포 98문 총 123문에 불과한 반면 북한군은 SU-76 자주포 48문, 122㎜ 곡사포 24문, 45㎜ 대전차포 139문, 76.2㎜ 곡사포 72문, 박격포 204문 총 523문에 달했다. 게다가 북한군은 한국군에 없는 모터사이클연대와 자주포부대와 같은 기동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군 화포의 사거리는 북한군 포병의 1/2에도 못 미쳐 보병부대에 근접해 화력을 지원하는 위험한 상태에서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실제 한국군 야포인 105㎜ 곡사포 사거리는 6525m인 반면 북한군 122㎜ 곡사포 사거리는 1만1710m에 달했다. 38선과 춘천 거리가 13㎞인 점을 감안할 때 북한군 122㎜ 곡사포는 일순간에 춘천시내를 초토화시킬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이었다.

훈련수준 면에서도 비교 불가한 상태였다. 중동부지역인 춘천·홍천지역은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2사단과 제12사단이다. 양개 사단은 춘천-홍천 축선에 투입하기 위해 산악전에 중점을 두고 훈련을 실시했다.

제2사단은 전쟁발발 직전인 1950년 4월 실시한 자체검열에서 최우수부대로 선정된, 전투력이 우수하다고 인정받은 부대였다. 제2사단은 산악전에 중점을 두고 1946년 창설돼 1948년까지 각 부대별 기초 군사훈련을, 1949년 7월까지 사단 또는 여단별로 공격전투에 중점을 둔 훈련을 실시했다. 1949년 7월부터 전차 및 포병을 동반한 군단급 지휘조 야외기동훈련에 중점을 둔 대부대 훈련을 실시했다.

제12사단은 1950년 4월 한인계 중공군 출신 약 1만2000명이 주축이 돼 편성됐다. 국공 및 대일전에 참전한 한인계 출신이 주축이 된 부대로 실전경험이 풍부해 개인 전투력은 높게 평가됐다.

반면 한국군은 초기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여순 사건과 공비토벌 작전 등으로 교육훈련이 제한됐다. 결과적으로 6.25전쟁 발발 직전까지 대대훈련을 마친 부대는 총 66개 보병대대 중 16개 대대(24%)에 불과했다.

한국군의 전력배치도 어수선한 상태였다.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당시 29세로, 전쟁 발발 2주 전인 1950년 6월 10일 보직 이동됐다. 전선을 파악하기에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춘천축선의 제7연대는 1949년 5월 춘천에 배치된 이후 13개월간 38선 경계임무를 수행한 경험으로 지형 숙지, 교육훈련, 군·경·관·민의 유대관계 등 전투준비면에서 비교적 양호했다.

반면 홍천축선의 제2연대는 전쟁 발발 일주일 전인 6월 20일 홍천으로 이동했고, 사단예비인 제19연대는 5월 1일 원주에 배치됐다. 이처럼 제2연대와 제19연대는 실제 전투를 준비하기엔 제한사항이 많았다.

특히 제2연대 방어지역인 인제-홍천 정면에는 콘크리트 진지가 없이 통나무 유개호 뿐이었고, 철조망이나 대인지뢰가 없는 데다 장병들은 책임지역 지형마저 낯선 상태였다.

북한군 제2군단 정면에 배치된 한국군 제6사단은 왼쪽으로는 가평 서북방 적목리(현 경기 가평면 북면)에서 인제 진흑동(현 강원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 이르는 총연장 84㎞를 방어했다. 험준한 사악과 많은 구릉이 존재하는 곳으로, 북한강과 소양강, 내린천, 홍천강 총 4개 주요 하천이 전투지역내 존재했다.

6.25전쟁 발발 한달 전 춘천지역 고교생 2500여명이 장병들과 함께 구축한 164고지 전경. 사진=김현수 기자

당시 소양강과 북한강의 폭은 60~280m이고, 수심은 1~5.2m(평균 2m)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물을 건너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만 홍천강과 내린천은 물을 건널 수 있었으나, 6·25전쟁 발발 하루 전인 24일 큰 비가 내리면서 물이 불어나면서 도하는 쉽지 않았다. 북한군의 기동력을 제압할 수 있는 천연적인 장애물인 셈이다.

김종오 제6사단장은 절대적으로 열세인 전투요소를 지형지물을 활용해 극복하는 전술을 적극 활용했다. 북한군 기계화부대는 실제 전투가 벌어진 곳곳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소부대전투에 발목이 잡히며 진격속도가 지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춘천지구전투 혹은 춘천·홍천지구전투에서 춘천 옥산포 일대에서 북한군 자주포를 파괴한 것과, 홍천 말고개에서 북한군 SU-76 자주포와 T-34 전차 10대를 파괴·노획한 것은 눈여겨볼 일이다. 전쟁 초기 한국군이 전차공포증(Tankphobia) 현상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자주포 파괴는 이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된 까닭이다. 한국군 제6사단이 8월 1일 낙동강 전선에 배치될 때까지 장병들의 전선이탈이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북한군 제12사단은 SU-76 자주포와 T-34 전차를 포함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한 데다 춘천 방향으로 전환한 후에도 춘천을 빼앗지 못한 채 전멸 수준으로 패배했다. 

북한군 제2군단은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춘천과 홍천 일원에서 발목이 묶이면서 춘천과 가평을 하루만에 점령한 후 서울 동남쪽에서 조공으로 진출해 서울 남부와 수원방면으로 우회해 한국군 주력을 포위하려던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軍·警·民·學이 함께한 춘천지구전투를 구국의 항전이라고 일컫는 배경이다.


유경석 기자 kangsan069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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