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부 신형수 부국장
[일간투데이 신형수 기자]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은 조선 효종은 명나라의 복수를 하겠다면서 북벌론을 펼쳤다. 서인들도 계속해서 무리한 북벌 운동을 벌여왔다.

1659년과 1674년 두차례의 ‘예송 논쟁’이 일어났다. 효종이 1959년 죽자 인조의 왕비이면서 효종의 어머니인 조대비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런데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할지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할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결을 펼쳤다.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아들이니 3년이 아니라 1년만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남인은 둘째 아들이라도 왕위를 계승했으니 첫째 아들이나 마찬가지로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송시열이 이끄는 서인의 의견을 받아들인 조대비는 1년만 상복을 입었다.

이후 1674년 효종의 비(妃)가 사망하자 조대비는 1년만 상복을 입어야 할 것인지 3년 상복을 입어야 할 것인지 또 다시 논쟁이 붙기 시작했다. 며느리인 효종의 비가 죽었기 때문에 시어머니의 상복 입은 기간이 차이가 난 것이다.

첫째 며느리는 1년 둘째 이하 며느리는 9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다는 규정이었다. 서인은 둘째 며느리로 보아야 하기에 9개월 상복을, 남인은 첫째 며느리로 보아야 하기에 1년 상복을 주장했다. 결국 조대비는 남인의 의견을 받아서 1년 상복을 입었다.

이것이 두 차례의 ‘예송논쟁’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상복 1년을 입을지 3년을 입을지가 “뭣이 중헌디?”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갈등을 보였다. 하지만 당시 북벌론으로 대기근으로 인해 백성들은 굶어죽을 판이었지만 조정은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를 두고 서인과 남인으로 갈려져 붕당정치를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사망하자 정치인은 ‘서울시장(葬)’을 할지 여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백선엽 장군이 사망하자 대전현충원 안장을 놓고 갈등을 보이고 있다.

박 시장의 서울시장을 반대하는 세력은 박 시장이 성추행 의혹이 있는 사람이고, 공무중에 사망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울시장’을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백선엽 장군이 일제 강점기 당시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근무하면서 독립운동가를 때려 잡은 경력 때문에 현충원 안장은 안된다는 목소리가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국민은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서울시장이나 현충원 안장 논쟁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뭣이 중헌디?”

두 차례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백성들은 더욱 힘들어졌고, 그것이 결국 나중에 세도정치로 이어지게 됐고,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됐다는 점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으로 나눠 끝없는 갈등을 펼치다보면 결국 국민들만 힘들어진다. 정치라는 것이 결국 갈등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지만 갈등 속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또한 정치이다.

현대판 예송논쟁이 뜨겁다.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를 놓고 뜨거운 논쟁을 했던 것처럼 ‘서울시장’이냐 현충원 안장이냐를 놓고 갈등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국민은 정치권에게 묻는다. 과연 그들의 눈에는 국민은 있는지. 그리고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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