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메이지의 그늘]①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왜 꼬였을까

  •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 승인 2020.08.24  16:56:27
  • 21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구글+
네이버 밴드
네이버 블로그
네이버 폴라
핀터레스트
URL 복사
default_news_ad2

- 메이지 유신, 서구열강 도전 불안감 속에 정한론 대두
현재 일본 집권세력, 경제위기감 속에 우경화 진행

   
▲ 1894년 7월 23일 조선의 갑오의병(왼쪽)과 전투를 벌이며 경복궁에 들어가는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오른쪽 마차 위에 탄 사람) 공사를 묘사한 '조선전보실기'의 다색판화. 자료=식민지역사박물관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20세기 이후 한국의 역사는 일본을 제외하고 설명할 수 없다. 일본은 20세기 전반 한국에 피식민의 경험을 안겼을 뿐만 아니라 독립 이후에도 한국인의 역사관과 경제적지형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근대사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위해서도,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도 일본과의 협력은 긴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일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표피적인 데에 머문다는 점이다. 막연한 민족주의적 반일 감정만을 앞세우다 양국간 감정 대립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반복되고 있다. 일본을 이끌고 있는 보수 세력은 어떻게 탄생했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 내면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일본의 기초는 거의 메이지 시대에 구축됐다. 특히 한국·중국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일본의 보수 세력은 메이지 시대의 연장선 위에 있다. 일본 전체가 '메이지의 그늘'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지 시대를 보면 현대 일본의 속살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양국이 저마다의 국가적 공동체성의 확립을 위해 추진하는 보훈정책과 문화에 대해서도 짚어보고자 한다. 한국의 보훈 문화는 일본과 북한이라는 '적'을 전제로 형성돼 왔다. 일본의 원호(보훈)제도는 전쟁의 책임 보다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 의식을 더 반영하며 형성돼 왔다. 그러나 피차간에 적을 전제한 정책으로는 통일과 평화의 시대를 열 수 없다. 메이지 시대의 내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적과 대립하는 보훈이 아니라 적을 품는 보훈문화의 기초를 다지고 한일 관계의 긍정적 미래를 그려보고자 한다. 
<필자 주>


한일 관계가 복잡해진 원인은 짧게는 일제강점기(1910-1945)에서 찾을 수 있고 더 올라가면 임진왜란(1592-1598)에까지 이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륙 정벌의 일환으로 조선을 침략해 6년간 두 차례에 걸쳐 전 국토를 유린하면서 조선은 큰 상처를 받았다. 일본은 결국 패퇴했지만 일본에 대한 조선의 감정은 격해졌다.

그 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德川) 막부(1603-1867)가 새로 정권을 잡으면서 100년 넘게 이어지던 센고쿠시대(戰国時代)의 내전은 종식되고 조선과도 화친을 추구한다. 조선도 이에 응답하면서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해 문물과 사상을 교류하는 시대가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조선의 지도적 지식인들은 명(明)의 멸망 후 당시 세계관의 근간처럼 여기던 주자학을 더 강하게 붙들었다. 이민족이 지배하는 청(淸) 대신에 자신들이야말로 주자학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가지고 주자학이 약한 일본의 지식수준을 무시하기도 했다. 일본 지배층도 그런 사실을 눈치 채면서 조선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강력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흐름이 생겨났고 일본은 서구 문명의 앞선 힘에 일찍 눈뜨면서 급속히 부국강병을 추구한다.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은 봉건적 지방 분권 체제인 막부체제로 있다가 부국강병을 추구하던 큐슈(九州) 지방의 무사들이 메이지 천황을 내세우며 이른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시도했다. '유신'은 영어로 'Meiji Restoration(메이지 복고)'이라 표현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옛 정신을 회복하면서 서구 문명을 수용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렇게 메이지 정부(1868-1912)가 탄생했다.


그 영향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가히 오늘날 일본의 토대를 놓은 정부였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
정부에서는 강대한 서구 열강의 도전으로 인한 내부의 불안을 해소하고 대륙으로 나아가고자 조선을 정벌해 일본의 '번(藩)'으로 삼자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기도 했다.

메이지 전반기까지 유행한 일본의 판화(니시키에·錦絵)인 '조선전보실기(朝鮮電報實記·1894)'에는 장대한 일본군이 초라한 조선 의병(갑오의병)을 제압하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조선인을 인종차별적으로 묘사하면서 청일전쟁(1894)과 조선침략을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일종의 국민 교화용 판화다. 조선전보실기는 조선에 대한 메이지 시대 일본 지도층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조선은 이미 일본의 관리 하에 있다는 생각도 엿보인다.

이런 정서로 조선을 본격 지배하기에 이르면서 한반도를 뒤집어놓았고 한일 관계를 풀 수 없을 정도로 꼬아놓았다. 이런 불행한 역사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이런 분위기를 계승하고 있는 이들이 일본 집권 여당인 자민당의 핵심 세력이라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현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를 필두로 한 보수 세력들의 영향력은 크다. 특히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2001-2006 재임) 총리 이후 보수주류보다 더 극우에 가까운 '보수방류'(김응교 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교수)들이 힘을 떨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메이지 시대 이후 지금까지도 군국주의적 정서가 지속되고 있고 이를 이끄는 보수 세력이 주류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30년 이상 구가하던 고도성장의 거품이 사라지고 경제적 위기의식이 커지면서 우경화가 더 진행됐다. 우경화를 주도하는 세력은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를 외치던 메이지 시대의 정서를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세계와 상대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 번번이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내는 한국을 불편해한다. 한국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려 한다. 하지만 무시하고 싶어도 지정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럴 수 없는 나라다 보니 계속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서강대 화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일본 근대 불교철학과 독일의 신학을 비교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 일본 코세이가쿠린 객원교수·중앙학술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종교간 대화의 사회적 의미를 천착하다가 종교의 이상을 평화로 규정한 이래 평화 연구에 몰두해왔으며 2020년 보훈교육연구원장으로 재직하면서 평화지향의 보훈문화를 진작시키는 데 지속적 관심을 두고 있다.

그동안 '평화와 평화들', '일본정신', '다르지만 조화한다', '근대 한국과 일본의 공공성 구상 I·II'(공저), '세계평화개념사'(공저), '세계의 분쟁'(공저), '탈사회주의 체제전환과 발트3국의 길'(공저), '아시아평화공동체'(편저) 외 100여편 이상의 책과 논문을 썼다.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dtoday24@dtoday.co.kr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ad47
ad46
default_news_ad5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ad49
ad51

4차산업

빅데이터VIEW

item90

포토뉴스

1 2 3
item84
ad54

오피니언

ad53

사회·전국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