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정부, 천황 '신격화' 통해 국민 행동 방향·의식 주재
천황제, 패전 이후에도 연호 등으로 문화적 영향력 지속돼

▲ 메이지 9년(1876년) 6월 2일 메이지 일본 천황 일행이 도쿄 만세이바시(萬世橋)에서 시작해 동북지역 오우지방으로 순행하는 장면을 그린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1842~1894)의 '메이지9년 6월 2일 오우 순행 만세이바시 진경(明治九年六月二日奧羽御巡幸萬世橋之眞景)'. 이 순행은 천황이 가족, 문무관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순례단을 구성해 대중에게 일종의 '포장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천황제 하의 충직한 신민을 만들기 위한 정치적 의례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천황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자료=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홈페이지.
[일간투데이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 지난 호에도 보았듯이 제사를 국가의 통치 수단으로 삼는 순간 그것은 외견상의 종교적 숭고함이나 순수한 정책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제사의 대상이 국익을 위해 '조작'될 수 있을 뿐더러 종교적 세계를 끌어와 침략 행위조차 숭고한 일인 양 정당화하고 피해자의 아픔을 외면한다. 그곳에서 부각되는 것은 국가 자체이다. 국가가 국가를 위하여 종교적 차원의 제사를 지내는 셈이다.

이런 현상은 어느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는 대외전쟁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전쟁을 주도했던 나라들이 이러한 국가관에 입각해있다. 일본도 국가적 영광을 내세우면서 자국을 위해 죽은 이를 제사 형식을 갖춰 받들어왔다. 메이지시대에 민간신앙인 신도를 국가 단위로 확장하며 '호국영령'을 위한 참배를 해온 것이 그 전형이다.

의례적 참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은 계속되는 전쟁기에 은급법(1923년~46년), 군사부조법(1937~46년), 전시재해보호법(1942년~1946년) 등을 만들어 참전 군인과 군속(군무원)에게 물질적으로도 지원했다. 군사부조법·전시재해보호법 등이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15년 전쟁기'에 만들어졌으니 이러한 법들은 전쟁하는 국가를 정당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국가가 지내는 제사의 목적이 결국 국가가 된 것이다.

일본의 사상가 고야스 노부쿠니(子安宣邦)는 "국가는 자신을 위해서만 제사를 지낸다. 오키나와에서 집단 자결한 주민들에게는 '숭고한 희생정신'이라는 미사여구를 부여할 뿐 국가는 제사를 지내지는 않는다. 미사일을 맞아 죽은 이라크의 아이들을 미국은 '자유'를 위한 피치 못할 희생이라며 무시할 따름이다"고 말했다.

이런 국가적 제사의 원리에 전쟁 상대국에 대한 관심은 들어있지 않다. 야스쿠니에 참배하며 전쟁을 기억하는 행위가 전쟁 피해자에게는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는 계기라는 사실은 간과된다. 자기만의 역사가 가능하다는, 역사가 자기만을 위해 있을 수 있다는 착각의 표현이라고나 할까. 상당수 일본의 우익들은 이런 역사관을 가지고서 그 역사의 이면인 타인의 고통은 염두에 두지 않거나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배경에서 패전 후에는 일본식 '역사수정주의'도 등장했다.

천황제는 기존의 해석을 자신의 특수 상황에 어울리게 재해석하는 수정주의적 역사관에 정당성을 제공해주는 동력이 되었다. 일본 역사에서 천황은 늘 존재해 왔지만 특히 메이지 정부에 들어 비판은 물론 객관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기 어려운, 현실 밖의 존재가 되었다.

1889년에 공포한 메이지정부의 '대일본제국헌법'에서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歲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제1조)'면서도 '천황은 신성하게 보호된다(제3조)'는 규정도 함께 두었다. 천황은 모든 권리를 다 가졌지만 책임은 면제되는 기이한 존재였다.

헌법 제정에 관여했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아마테라스의 자손인 천황을 최상위로 모시는 것이야말로 일본 입국의 근본이 되어야"한다고 말했는데 메이지정부는 실제로 그 말을 구체화시켰다. 천황이 국민적 행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의식까지 주재하는, 사실상 천황의 '신격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구노 오사무(久野收)는 "일본 천황이 독일 황제와 로마 교황의 두 자격을 한 몸에 갖추었고 국민은 정치적으로 천황의 신민이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천황 신자(信者)가 되었다"고 말한다. 외적으로 천황제는 국민이 헌법에 입각해 천황이라는 절대 군주를 신봉하는 체제지만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렇게 신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내적 시스템을 확보해갔다. 제사의 국가화, 제사의 정치학에 기반한 일종의 '천황교'가 탄생한 것이다.

일본의 불교철학자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는 1970년대에 "1945년(패전)까지는 천황 숭배가 일본에서 가장 심했던 신앙 형식이었다…일본인은 산 인격으로서 천황 개인 속에서 일본 국민의 집약적 표현을 발견하려고 한다…유신 이후에는 천황 숭배가 강권으로 집행되고 최근에는 그것이 절대 종교 형태로 되었으며 다시 국민 전체에게 강제 형식을 가진 신흥종교로 군림하였다"고 말했다.

종교학자 무라카미 시게요시(村上重良)는 "메이지 정부가 이세신궁을 정점으로 전국의 신사를 조직화한 국가신도를 국가의 제사로서 초종교적 지위에 두고 그 체제의 틀 안에서 여러 종교의 활동을 용인했다"고도 말한다.

이때 '국가신도'는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을 점령했던 연합군 총사령관이 내린 '신도지령(神道指令, 1945)'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이다. 국가신도라는, 구체적인 체계를 갖춘 하나의 종단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메이지시대 이래 천황제가 일본 전체를 포괄하는 거대한 체계를 갖추고 일종의 국가 종교처럼 기능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세신궁이나 야스쿠니신사나 등을 정점으로 하는 신도의 국가주의적 체계는 메이지시대 천황제의 연장선에 있거나 그에 사상적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일본사상가 아마 도시마로(阿滿利麿)는 "국가신도는 천황을 교조로 하고 '교육칙어'나 '군인칙유(軍人勅諭)'를 경전으로 하여 전국의 신사를 교회로 삼은 국가 종교 조직이었다"고 말했다. 일본 내 천황제의 영향력을 잘 반영해주는 진단들이라고 할 수 있다.

패전 이후 천황은 상징적 존재로 머물고 천황제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일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연호를 사용하는 등 대다수 일본인에게 천황제는 자연스럽다. 천황제는 일종의 문화가 되어 영향력도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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