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실패… 곧 국가의 실패입니다 - 9

▲ 조광한 경기도 남양주시장
지난번 글에서 신숙주·이완용·김상헌의 삶을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그 중 김상헌과 병자호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외부의 침략을 받고 끔찍한 고통을 겪은 치욕적인 사건들이 있습니다. 고려 때 몽골의 침략,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 인조 때 병자호란, 그리고 경술국치의 망국 등입니다.

그 중 가장 분통터지는 환란이 병자호란 입니다.다른 침략들은 나라가 힘이 없고 쇠약해서 어쩔 수 없이 불가항력으로 당한 고통이었다면,병자호란은 조금만 지혜롭게 판단하고 대처했다면 막을 수 있는 재앙이었습니다.

광해군 때 명나라는 국력이 기울고 있었고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신흥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명나라가 지원군을 요청하자 광해군은 1만3천 명의 병사를 파견했지만 의도적으로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습니다.

후금의 칸(왕) 누르하치는 명과 후금 사이에 끼인 조선의 부득이한 사정을 이해한다며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중립 실리외교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는 주요한 명분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 폐위 교서에서 “조선이 중국을 섬긴 것이 200여년인데 의리는 군신이며 은혜는 부자와 같다.”며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비난했습니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권력욕에 반정을 일으키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명나라를 섬기는 사대를 주요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명나라에 대한 군신의 의리를 저버린 불충과 반역으로 규정하며 친명반청에 앞장섰습니다.

1636년 청태종은 ‘너희 나라’라고 하대하며 군신관계를 요구합니다.조선은 화친을 배척하는 척화파와 청과 협상하자는 주화파로 갈라집니다.

광해군을 내쫓고 조정을 장악한 대부분의 반정세력은척화를 주장했는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광해군의 실리외교가 옳은 것 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자기부정과 자기모순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상헌은 반정 당시 상(喪)중이라 반정공신은 아니었지만 맹목적이고 허망한 사대의 명분으로 척화와 전쟁을 주장합니다

반면에 반정공신이었지만 주화파인 최명길은 청과 협상하고 전쟁만은 피하자고 호소합니다. 대세는 척화로 기울어 집니다.

그 해 12월 청태종은 병자호란을 일으켜 침략했고,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했는데 성이 포위되고 군사들이 얼어 죽는 상황에도 김상헌은 끝까지 항전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더이상 버틸수 없었던 인조는 47일 만에 송파,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으로 항복했습니다.

항복이 결정되자 김상헌은 가족들 앞에서 목을 맸는데 아들이 끌어내려 살았습니다. 가족들 앞에서 자결하려한 것이 일종의 쇼였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하며 무릎을 꿇을 때, 김상헌은 동문으로 남한산성을 빠져나가 고향인 안동으로 가서 숨었다고 합니다.

3년 후 그는 청나라로 끌려가 이 점을 추궁 당하자 “늙고 병들어 걸을 수 없어 임금을 따라가지 못했다. 논쟁해도 채택되지 못하면 물러나 스스로 안정하는 것도 신하의 의리다.”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조선으로 돌아와 인조와 최명길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김상헌은 한때 절개와 지조의 상징으로 추앙받기도 했지만, 척화파의 의견을 따랐다가 최악의 굴욕을 당한 인조는 훗날 김상헌을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김상헌이 나라가 어지러우면 같이 죽겠다고 했지만 먼저 나를 버리고 무식한 자들의 앞장을 섰다. 김상헌의 일은 웃음거리도 못되는데 무식한 자들은 남들이 못하는 일을 했다고 하니,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훔치기가 쉽다.”라고 했습니다.

반정세력은 명나라를 섬겨야한다는 허황한 명분론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를 혼란에 빠트렸고, 김상헌 등 척화파는 어처구니없고 무모한 외교정책으로 수많은 백성들을전쟁의 나락으로 몰아넣고 참혹한 희생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3만2천명이 학살에 가까운 살육을 당했고, 50~6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수많은 여인들은 능욕을 피하려 바다에 몸을 던졌고, 미혼녀는 물론 기혼녀는 아이를 죽이고 끌고 갔습니다. 돈을 내고 돌아온 소수 양반가의 환향녀(還鄕女)들은 가족과 사회에서 철저히 배척되었습니다.

병자호란은 피할수 있었던 전쟁을 피하지 못한 조선 최악의 사건이라고 할만 합니다. 이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잘난척 말만 앞세운 그들의 머릿속에 백성들이 있었을까요..? 말만 그럴듯한 명분론은 포퓰리즘만큼이나 위험합니다.

지금 우리사회도 시대착오적인 허황한 명분으로 자신만이 정의인양 주장하는 김상헌 같은 사람이 주목을 받고 있는건 아닌지.. 참으로 우려스럽습니다.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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