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실패..,곧 국가의 실패입니다 -11

▲ 사진=조광한 남양주시장

최근 몇 차례 조선의 역사를 설명 드렸는데, 오늘은 조선의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붕당(朋黨)정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벗 붕(朋) 자를 쓰는 붕당은 같은 학맥과 정치색을 가진 집단으로 지금의 정당과 유사한 개념입니다. 예전에는 당파싸움이라고 불렀지만 그 용어가 일제의 식민주의 논점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당파를 짓고 싸움하기 좋아한다는 ‘당파성론’으로 일제의 국권탈취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에게 패배주의 의식을 심어 식민통치를 감수하게 하려고 한 용어라서, 지금은 주로 붕당정치라고 말합니다.

조선의 붕당을 사색(四色)당파로 나눕니다. 4개의 주요 당파는 북인, 남인, 노론, 소론이고 나중엔 시파와 벽파가 생겼습니다. 대립에서 지는 것은 곧 몰락, 유배,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죽고 죽이는 피바람을 일으키며 몹시 치열하게 전개 됐습니다.

선조 때 붕당이 생겼는데 그 전에는 훈구(勳舊)파와 사림(士林)파가 대립했습니다.

훈구파는 수양대군과 함께 왕위찬탈에 가담한 공신들이 대규모의 토지와 노예를 받으며 등장했고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히자 제9대 임금 성종은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대거 등용했습니다. 사림파는 향촌의 중소지주였고 학맥은 고려 말의 정몽주에서 이어져왔습니다.

사림파는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비판했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훈구파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의 4대 사화(士禍)를 일으킵니다. 사화란 사림파가 화를 입었다는 뜻으로
사화때마다 수많은 선비들이 학살되었습니다.

제14대 임금 선조 때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은 끝이나고 사림파가 주도권을 장악합니다. 훈구파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데다 선조가 사림파를 대거 등용한 때문인데, 사림파는 서로 분열하면서 붕당으로 갈라집니다.

직접적인 발단은 1575년 선조8년,이조전랑(吏曹銓郎)직의 문제였습니다. 이조전랑은 정5품, 정6품을 합쳐 부른 말인데 직급은 높지 않지만 인사권을 가진 막중한 자리였고, 선배격인 구사림과 새로 들어온 신사림이 서로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그 문제로 서대문 쪽에 사는 구사림 심의겸 일파의 서인(西人)과 동대문 쪽에 사는 신사림 김효원 일파의 동인(東人)으로 나뉘며 첫 붕당이 생겼습니다.

그 후 서인인 정철이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건의했다가 파직되자 득세한 동인은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인 북인(北人)과 유배로 끝내자는 온건파인 남인(南人)으로 갈라져 북인, 남인, 서인의 세 당파가 형성됐습니다.

다음 임금 광해군 때 북인 중에 광해군을 지지했던 대북(大北)파가 집권하며 영창대군을 지지한 소북(小北)파를 숙청하고 영창대군은 사사, 인목대비는 폐비시킵니다.

그러자 인조반정이 일어납니다. 인목대비 폐비가 불효이고 광해군의 명청 간 중립외교가 명에 대한 불충이라는 명분으로,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했고 북인은 몰락합니다. 그 후 서인인 김상헌 등 척화파의 주장으로 병자호란의 화를 당하게 됩니다.

서인과 남인의 공조가 이어지다가 제18대 임금 현종 때 두 차례 예송(禮訟)논쟁이 일어납니다. 1차는 효종의 상(喪)에 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을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서인은 1년, 남인은 3년을 주장해 서인이 이깁니다. 2차는 현종의 모후 상에 대비가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한 논쟁으로 이번에는 남인이 이기게 됩니다.

예송논쟁의 본질은 왕권과 신권의 충돌이지만, 백성의 삶과는 아무 상관없는 형식에 관한 소모적인 논쟁으로 서로가 죽고 죽인 가장 어처구니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제19대 임금 숙종 때 다시 집권한 서인은 남인을 다 죽이자는 강경파이자 노장파인 노론(老論)과, 핵심만 죽이자는 온건파이자 소장파인 소론(少論)으로 갈라집니다.

이렇게 해서 1683년 숙종9년에 북인, 남인, 노론, 소론의 사당파가 됐습니다. 남인은 잠시 재집권했지만 곧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었고, 북인은 인조반정 때 몰락했으므로 그 후에는 주로 노론과 소론이 대립했습니다.

제21대 임금 영조는 탕평책으로 인재를 두루 등용해 정쟁은 한동안 잠잠했습니다. 그러나 제22대 임금 정조가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하려하자 지지하는 시파(時派)와 반대하는 벽파(僻派)로 갈라졌습니다.

시파는 주로 남인계열, 벽파는 주로 노론계열인데 사색당파는 해체되고 두 개의 당파로 재편된 겁니다. 그 후 대체로 노론 벽파가 권력을 장악했고, 노론의 장기집권은 제23대 순조 이후 소수 가문의 세도(勢道)정치로 귀결됐습니다.

세도정치의 중심이 병자호란 때 척화파 김상헌의 후손인 신 안동김씨, 그 중에서도 한양 장동에 모여 살던 장동김씨라는 건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조선의 붕당정치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상대 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비판하고 논쟁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건전하고 건강하게 정책의 대안을 제시하고 논쟁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민생과는 상관없이 생산적이지 않은 소모적인 내용과 음모와 누명으로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잔인한 보복을 한 것이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겁니다. 상대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공격을 일삼은 붕당의 대립은 결국 망국의 길로 가게됩니다.

특히 현종 때의 예송논쟁, 즉 상복을 입는 기간의 논쟁은 민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예법과 형식의 논쟁이었고 내막에는 오직 권력장악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지금도 오직 권력 그 자체만을 위해 상대를 흠집 내고 죽이려들고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며 붕당이 저질렀던 것 같은 거짓과 음모를 일삼고 있는 건 아닐까요..?

결국, 도덕성과 인간성이 결여된 사람들은 모든 사안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도덕성과 인간성이 있는 사람들은 부끄러워서라도 그렇게 못하고 또 안 합니다.

우리 정치권이 도덕성과 인간성을 회복하고, 국민을 위한 건전하고 건강하고 생산적인 경쟁이 정착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년 대통령선거는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너무나 중요한 선거입니다.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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